음양사 - 고혹적인 어둠이 매력적이었던 세계, 헤이안




"안 갈 텐가?"
"으, 음."
"가세."
"가세."
일은 그리 되었다.

 

 

우아하고 멋스럽고 음침한 어둠 속을,
바람에 떠도는 구름처럼 표표히 흘러간 남자의 이야기




점심은 넘기었으나 아직 저녁이 되기에는 이른 시간. 두 사내가 툇마루에 앉아 술을 들이키며 정원의 경관을 즐기고 있다. 손질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제멋대로 자랐으나 그 나름의 운치가 있는 정원을 두 남자, 아베노 세이메이와 미나모토노 히로마사는 마음껏 즐긴다.

이곳은 아베노 세이메이의 집. 계절마다 그 모습을 달리하는 정원은 언제나 그 나름의 멋을 뿜어내고 있다. 그 광경을 떠올리자면 세이메이와 히로마사가 조용히 풍류를 즐기며 말 없이 술을 들이키는 장면 역시 연상이 된다.

집 안에는 그 둘의 기척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 넓은 집에 오직 두 남자만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세이메이가 부르고자 하면 그가 부리는 여러 식신들이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식신이 준비해준 안주와 술을 조용히 들이키다, 히로마사가 나즈막히 말을 꺼낸다. 그것은 이 성격 좋고 정직한 사내가 스스로 느낀 무언가일 수도 있고, 그가 어디에선가 듣고 온 기이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다른 이의 부탁을 받아 세이메이에게 음양의 일을 부탁하려는 일일 것이다. '좋은 사내' 미나모토노 히로마사는 다른 이들의 부탁을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베노 세이메이 - 일본 최고의 음양사라는 이 사내는 그런 히로마사의 말을 입가에 미소를 띄며 듣는다. 키가 훤칠하고 피부가 희며 입술이 붉은 남자. 히로마사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지만 외모만 보고서는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히로마사가 정좌를 하고 등을 펴고 곧게 앉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이메이는 아무렇게나 앉아있다 -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다리에 대고, 그 손 위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여유롭고 나태해 보이기까지 한다.

히로마사의 이야기가 끝나면, 세이메이는 주를 거론한다. 히로마사가 듣기에는 도무지 모를 말들이다. 허나 그렇게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이 남자는 세이메이가 "가세," 하고 말하면 "가세"하고 답한다. 그렇게 그들은 헤이안의 기이함과 만난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들은 상당히 대중적이다. 음양사를 제외한다면 작가를 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의 소설들은 한 마디로 "재미있다". 음양사 역시 대중적인 면이 상당히 드러난 작품으로, 헤이안이라는 다소 생소하지만 흥미가 동하는, 거기에 신비로움이 살짝 겸해진 배경과 누구나 끌릴 법한 요괴들의 이야기로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일본 최고의 음양사였다는 아베노 세이메이. 그 이름은 아직도 전해져 일본의 음양사라는 것을 그다지 모르는 사람들도 한번 즈음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헤이안이라면 꽤나 오래전의 세계. 한반도는 삼국시대를 겪고 있었을 터였다. 유명한 음양사였다고는 하나 딱히 귀족이나 황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도 아닌데 그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들이 꽤나 많은 것을 보면 그는 과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인물이 신비로 둘러싸인 헤이안의 밤길을 거니는 모습은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것에 세이메이와 히로마사가 맞닥뜨리는 기묘한 이야기들 역시 재미있다.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흥분을 느끼게 하거나,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 애타게 하거나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닥 거창하지는 않으나 때로는 잔잔한 유쾌함을, 때로는 고즈넉한 멋을, 그리고 어느 때에는 안타까운 슬픔을 지니고 있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음양사를 읽다 보면 어느새 헤이안의 저녁, 또는 밤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 속에서 주로 나오는, 소를 모는 이 없는 우차에 세이메이와 히로마사가 올라타고 세이메이의 집에서 꺼낸 이야기의 실제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믐달이 뿌옇게 그 빛을 내리는,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밤길에 우차의 바퀴 소리만 나지막히 울려 퍼진다. 우차 안을 들여다 본다면 히로마사는 약간 굳어있고, 얼굴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감이 어려있으리라. 그 옆에 앉은 세이메이는 역시나 대조적으로 여유로운 자세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얼굴이 굳은 히로마사를 보고 피식 웃어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세이메이의 태도 때문일까. 소설에서는 전체적으로 '다급함'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여인이 복수를 위해 귀신이 되기를 빈다는 이야기에서도 다급함보다는 서서히 다가오는 소름에 몸이 쭈뻣해진다. 서로를 향해 "가세" 라고 말하는 두 남자의 말은 도저히 귀신 퇴치를 위한 것 같지 않다. 그저 어디 산보라도 나가는 듯한 느낌. 소설의 장면 하나 하나를 상상하고 그 풍경을 음미하며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인 것이다.

소설에 따르자면, 헤이안은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아 형체가 뚜렷이 보이지 않고, 무언가 보인다 싶어 잡으려 하면 허깨비를 잡은 듯 허공을 휘젓게 되는 세계. 그러나 드문 드문 구름 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잔잔하면서도 우아한 피리 소리가 공기를 타고 널리 퍼지는, 그리하여 오히려 어둠의 풍류를 즐기게 되는 세계.

그래서 난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여유롭고 느릿한 문체를 읽고 있으면 기이하고도 매력적인, 그리고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음침함이 깃든 헤이인의 세계가 다가오는 듯 하다. 그 길가에서 요괴를 맞닥뜨리면, 그 뒤편에 하얀 기리기누를 걸친 아베노 세이메이가 어딘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을 것만 같다.

by 월천군 | 2008/08/14 23:28 | 책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wnsd.egloos.com/tb/194914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the endless question
by 월천군
메뉴릿
카테고리
전체
A Day in Life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창작 소설
만화 이야기
잡담
미분류
최근 등록된 덧글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전블로그
2008년 08월
이글루링크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teatime